여행 및 등산/산사를 찿아가는길

원효대사가 전생에 와 본곳임을 깨달았다는 우두산 고견사

Brighten lee 1 2014. 3. 11. 06:30

 

고견사는 667년(문무왕 7) 원효와 의상 두 스님이 창건했다고 전한다.

한편으로 신라 애장왕(재위 800~809) 때 순응과 이정스님이 창건하였다고도 하는데, 현재 고견사에서는 앞의 창건설을

정설로 보고 있다.고려시대에서는 1360년(공민왕 9) 달순과 소산이 김신좌와 함께 중건하였는데, 한때 견암, 견암사, 견암선사

등으로도 불렀다.  1424년(세종 6) 사원의 승려 수와 전지의 결수를 정할 때, 45결이었던 전지를 100결로 늘리고 승려의 수를 70명으로 하였다. 1630년 설현, 금복, 종해 스님이 중건하면서 고견사로 개칭하였는데, 이는 옛날 원효 대사가 계신 곳이라는 의미를 지니고 있다. 한편으로는 원효 대사가 이 절을 창건할 때 이곳에 와 보니, 전생에 와 본 곳임을 깨달았다는 데서 고견사라는 이름을 지었다고도 전한다.

 

고견사는 주차장에서 방문하기 위해서 40~50분정도의 산길을 걸어올라야 한다.

부처님께 공덕을 빌기위해 오르는것은 괜찮지만 그냥 방문은 쉽지않은 거리다.

글쓴이는 우두산 의상봉을 올랐다 하산길에 고견사를 방문하였다.

 

 

약사전 옆에는 자연의 암벽에 부처님을 조각하여놓았다.

 

 

 

 

우두산에서 흘러내린 식수는 여행자의 갈증을 해소한다.

 

 

 

 

 

대웅전은 팔작지붕에 앞면과 옆면 각 3칸씩의 건물로, 근래에 지었다.

외벽에는 석가부처님 전생담과 여러 가지 불교의 교훈적인 이야기들을 그림으로 나타낸 벽화가 있다.

안에는 최근에 모신 금동석가여래삼존불상과 후불탱 등이 봉안되어 있다.

 

 

 


대웅전 안에 경상남도문화재자료 제170호로 지정된 동종이 있다.

종신에 명문이 있어 1630년(인조 8)이라는 제작연대와 조성에 참여한 인물들을 알 수 있다.

형태는 용눈 주위에 이중으로 된 연꽃무늬가 있다.

 

 

 

 

범종각

 

 

 

경상남도유형문화재 제263호로 지정된 고려시대 석불이 모셔져 있다.

이 석불상은 크기는 작으나 당당한 체구가 돋보이는 일종의 마애불이다.

현재 전체적으로 마멸이 심한 편이라 세부적인 표현은 정확하게 알 수 없다. 머리는 육계가 뚜렷한 소발이며, 얼굴에는 눈, 코,

입 등의 희미한 윤곽만이 남아 있다.   고려시대 석불의 양식적 특징을 잘 간직하고 있다.

 

 

 

 

 

대웅전앞의 삼층석탑

 

 

 

대웅전앞의 배례석

배례석이란 왕과 같은 높은 신분인 사람이 와서 법당 밖에서 위에 올라가 절을 할 때 사용하던 돌로서, 배례석이 전하는 사찰은 매우 드물다. 시 숙종이 하사했다는 '강생원' 편액과 관련지어서 볼 수 있지 않을까 한다.

 

 


 

 

해후소

 

 

 

불기 2545년은 서기2001년이다.

 

 

 

주차장에서고견사까지의 이동거리가 있어 이 모노레일을 이용하여 생필품을 운반하는걸로 생각된다.

 

 

 

 

 

 

 

 

고운 최치원선생의 지팡이가 자라나 지금의  은행나무가 되었다고 전해지며 수령은 일천년을 자랑한다.

 

 

 

 

고견사를 빠져나와 하산을 서두른다.

 

 

 

고견사에서 하산하며 바라본 의상봉

 

 

 

고견사 일주문

 

 

 

 

고견사를 하산하다보니 빼어난 암릉미와 구비구비 흐르는 폭포가 보이는데 폭포촬영은 놓쳤다.

 

 

고견사에서 주차장까지 하산하는데 40~50분정도 소요된다.

 좌측은 고견사,우측은 등산로다.

 

 

주차장 입구

고견사에는 세가지 볼거리가 있다.

80m높이의 가정산 폭포와 최치원의 은행나무,의상대사가 수도중에 먹을만큼의 쌀이 나왔다는 쌀굴이 있는데

글쓴이는 오늘여행중 쌀굴을 놓쳤다.훗날 다시방문하여 쌀굴을 찾아 보아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