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가을날의 전북여행을 이어간다.
미래를 꿈꾸는 사람들을 위한 도량이 있다. 이 도량은 국민들에게 안락과 희망을 주기 위해 건립되었다.
이 도량의 스님들은 다가오는 내일을 준비하기 위해 수행정진하고 있으며, 많은 사람들은 또한 이 도량에서 자기가 지은 악업의 인연을 참회하고 새로 지은 선업의 인연을 통해 꿈을 키우고 있다.
이 도량이 바로 한국 미륵신앙의 근본도량 금산사다.
미륵전에서 수행하고, 기도하고 원력을 가진 많은 사람들 중에서 자기의 원을 성취한 사람도 있었지만, 꿈을 이루지 못한 슬픈
이야기도 많이 있다. 백제의 한을 달래며 후삼국의 통일을 꿈꾸었던 견원은 금산사에서 자기 꿈을 포기하기도 했다.
견훤이 못다 이룬 원력의 그림자는 아직도 금산사 곳곳에 남아 있다.
일주문을 지나 100m 쯤 오르면 작은 개울 건너에 자리잡은 금강문을 만나게 된다.
1994년에 건립된 이 금강문은 정면 3칸, 측면 2칸의 맞배지붕 건물로 내부에는 금강역사상 2구와 함께 사자를 타고 있는
문수동자상과 코끼리를 타고 있는 보현동자상이 봉안되어 있다.
금강문과 일직선상에 있는 천왕문은 1994년 가람을 중수하면서 새롭게 조성된 건물이다.
정면 3칸, 측면 2칸의 맞배지붕 건물로 내부에는 좌우 각 2구씩 목조사천왕상이 봉안되어 있다.
미륵전의 정면 서쪽에 위치한 대장전은 정면 3칸, 측면 3칸 규모의 다포식 팔작지붕 건물이다.
금산사 사적기에 따르면, 원래 대장전은 진표율사가 미륵전을 짓고, 이를 장엄하는 정중목탑으로서 팔각원당형으로 조성했던
건물이라고 한다. 당시의 양식은 탑과 같은 산개형의 층옥으로서 맨 꼭대기 옥개에는 솥뚜껑 모양의 철개를 덮고, 다시 그 위에 불꽃 모양의 석조 보주를 올렸다. 그 뒤 조선시대에 들어와 1635년(인조 13)에 수문대사가 가람을 중창하면서 본래 목탑이었던 것을 지금과 같은 전각의 형태로 변형하면서 대장전이라는 이름이 붙여졌다. 그 때문에 본래의 모습과는 다르게 변화하였지만 전각 꼭대기에 복발과 복주가 남아있어 신라시대의 목탑양식을 알 수 있는 중요한 자료이다.
1922년에 지금의 위치로 이전되었다.
미륵전은 금산사의 중심 법당으로 진표율사 진신장골탑비명 에는 '진표율사가 미륵장륙상을 3층전에 봉안했다'고 기록되어 있으며, 지금의 모습은 정유재란 때 소실된 것을 1635년(인조 13년)에 수문대사가 중건한 것이다.
이후 1748년(영조 24)과 1897년ㆍ1938년ㆍ1994년 등 여러 차례에 거쳐 중수 및 보수된 바 있다. 1층에는 ‘대자보전 2층에는 ‘용화지회, 3층에는 ‘미륵전’ 등의 각기 다른 편액이 걸려있는데, 이들 편액은 이름이 다르지만 모두 미륵불의 세계를 표현하고 있는 것이다.건물은 팔작지붕의 3층 구조이다. 1층과 2층은 정면 5칸, 측면 4칸의 규모이며, 3층은 정면 3칸, 측면 2칸으로 줄어들었다. 장대석의 기단을 마련하여 그 위에 막돌초석을 올리고, 여기에 기둥을 세워 창방과 평방을 짜 올려 기둥과 기둥 사이에 공포를 얹은 다포식 건물이다. 처마는 겹처마이며, 추녀에는 활주를 세워 건물의 무게를 분산시켰다.
금산사 당간지주
절에 중요한 행사나 법회가 있을 때 깃발을 걸어서 이를 알리는 일종의 안내판이 당간이고, 이를 지탱하는 것이 지주이다.
그래서 당간지주는 반드시 절의 입구에 놓이게 마련이다.
금산사의 당간지주는 금강문에서 동북쪽으로 50m쯤 떨어진 곳에 위치하고 있으며, 원래의 상태 그대로 잘 남아 있다.
현재 당간을 받치고 있던 간대와 지주를 놓은 기단석 등이 완전한 형태를 갖추고 있다.
기단부는 단층이며, 잘 다듬은 6장의 길쭉한 장대석을 조합한 지대석 위에 지주를 낀 기단석을 받치고 있는 형식이다.
기단석은 4매의 장대석으로 장방형을 이루고, 각 측면마다 우주와 탱주를 두어 면을 둘로 구분하였으며, 중앙을 음각하여 위
아래의 가장자리에 볼록하게 솟은 띠를 둘렀다. 또한 둘로 나뉜 기단의 각 면에는 안상을 새겼다.
천왕문을 지나 가람의 중심으로 들어서는 중문역할의 건물이 보제루다. 현재의 건물은 1960년대에 건립되어 1998년에 증축된 바 있으며, 조선 중기에 만세루라는 12칸 규모의 누각이 있었다고 전하고 있어 지금의 보제루는 아마도 이 만세루를 계승한 건물이라 생각된다. 정면 7칸, 측면 3칸의 2층 팔작지붕 건물로 아래층은 절 앞마당으로 오르는 계단 역할을 하며, 2층은 주로 법회나 대중집회의 공간으로 활용된다. ‘보제루’라는 편액 외에 ‘개산천사백주년기념관’이라는 편액을 함께 걸고 있으며, 내부에는 최근에 조성된 금동석가여래좌상이 1구 봉안되어 있다.
|
![]() |
진표스님은 어려서부터 활쏘기를 매우 좋아하였고 뛰어난 활솜씨를 지니고 있었다. 그래서 늘 활을 들고 들과 산을 누비며 사냥을 하는 것이 그의 일과였다. 그러던 어느 봄날 사냥을 가던 스님이 논둑에 앉아 쉬다가 개구리를 잡았는데, 사냥을 하고 내려오는 길에 가져가리라 생각하며 개구리를 버들가지에 꿰어 물에 담가둔 채 산으로 올라갔다.
사냥을 한 뒤 개구리는 까맣게 잊어버린 채 그대로 집으로 돌아왔다.
달이 가고 해가 바뀌어 이듬해 봄이 되었을 무렵, 예나 다름없이 사냥을 하러 가던 스님은 논두렁에서 구슬프게 우는 개구리
소리를 듣게 되었다. 문득 지난해의 일이 떠올라 걸음을 재촉하여 그 자리로 가보았다.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개구리가 버들가지에 그대로 꿰인 채 울고 있는 것이었다.
‘내가 어찌 해가 넘도록 개구리에게 이런 고통을 받게 했단 말인가!’
스님은 크게 놀라 뉘우치면서 탄식하였고, 이 일로 큰 깨달음을 얻게 되어 금산사로 출가하여 스님이 되었다.
가람의 중심에 위치한 대적광전은 정면 7칸, 측면 4칸의 다포식 팔작지붕으로 조선시대 건물이었으나 1986년에 화재로 전소된 후 1994년에 본래대로 복원되었다.
대적광전이 지금의 웅장한 규모를 갖게 된 것은 정유재란 때 절이 전소된 후 1635년 수문대사의 중창에 의해서이다.
이때 별도로 모셨던 비로자나불, 노사나불, 석가모니불, 아미타불, 약사여래불과 여섯 보살을 함께 모심으로써 여러 전각들을
대적광전 하나로 통합하여 창건한 것이다. 이후 1776년(영조 52)에 중수된 바 있고, 1926년과 1938년 미륵전 보수 때 함께 수리되었다. 대명광전, 극락전, 약사전 등의 당우를 통합시켜 놓은 통합법당으로 법요를 집행하는 곳이다.
범종각은 보제루 향 좌측에 있는 자리하고 있다.
정면 3칸, 측면 2칸의 팔작지붕 건물로 반듯하게 정돈된 석축 위에 자리잡고 있다. 불전사물인 범종ㆍ법고ㆍ목어ㆍ운판 등을
모두 봉안하고 있으며 범종은 1969년, 운판은 1986년에 조성되었고 법고와 목어 역시 비슷한 시기에 조성된 것으로 보인다.
대광전과 나란히 자리잡은 명부전은 내부 정면 출입문 위에 있는 ‘금산사시왕전중수기 현판을 통해 1857년(철종 8)에 중건된
사실을 알 수 있을 뿐 그 이전의 연혁에 대해서는 알 수 없다.
명부전은 조선시대 가장 유행하던 전각이다.
이 노주는 대적광전에서 서남쪽에 위치한 대장전으로 가는 길 중간에 있는데, 어떠한 기능을 위해 만들어진 것인지 불분명하다. 노주란 ‘드러낸 기둥’이란 뜻인데 석조 대좌 위에 보주형 장식을 한 돌기둥이 안치되어 있기 때문에 단순히 노주라고 불렀던 것 같으며, 금산사에서만 볼 수 있는 유일한 예이다.
노주란 '노반지주'의 줄임말로서 처음에는 전각의 정면 귀퉁이에 세우는 두 개의 장대였다가 나중에 탑의 상륜부를 구성하는
부재로 사용되었다. 그러나 아쉽게도 탑의 일부인 이 노주가 왜 별도의 조성물로서 만들어졌는지는 현재로선 알 수 없다.
가람의 중심에 위치한 대적광전은 정면 7칸, 측면 4칸의 다포식 팔작지붕으로 조선시대 건물이었으나 1986년에 화재로 전소된 후 1994년에 본래대로 복원되었다. 대적광전이 지금의 웅장한 규모를 갖게 된 것은 정유재란 때 절이 전소된 후 1635년 수문대사의 중창에 의해서이다. 이때 별도로 모셨던 비로자나불, 노사나불, 석가모니불, 아미타불, 약사여래불과 여섯 보살을 함께 모심으로써 여러 전각들을 대적광전 하나로 통합하여 창건한 것이다. 이후 1776년(영조 52)에 중수된 바 있고, 1926년과 1938년 미륵전 보수 때 함께 수리되었다. 대명광전, 극락전, 약사전 등의 당우를 통합시켜 놓은 통합법당으로 법요를 집행하는 곳이다.
나한전은 1995년에 새로 건립한 건물로 대적광전 뒤쪽에 위치하고 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방등계단의 바로 옆에 자리하고 있었는데, 이곳에서 계단을 참배하였기 때문에 계단예배전이라고도 불렀다.
대적광전 뒤편에 나한전과 나란히 위치한 조사전은 앞면 3칸, 옆면 2칸의 팔작지붕 건물로 1998년에 건립되었다.
내부에는 진표율사를 비롯하여 혜덕왕사, 원명대사, 뇌묵대사 등 역대 조사들의 진영을 봉안하고 있다.
나한전과 조사전 뒤쪽 가람 가장 후미진 곳에 위치한 삼성각은 정면 3칸, 측면 2칸의 겹처마 맞배지붕 건물로 되어 있다.
1940년대 경에 건립되어 방등계단과 오층석탑의 동쪽에 적멸보궁과 나란히 위치해 있었으나, 최근 가람을 정비하면서 지금의
위치에 자리를 잡았다.
금산사 오층석탑
미륵전 북쪽의 방등계단 앞에 자리하고 있는 석탑이다.
정사각형 판재를 이용한 전체높이 7.2m로 단순한 구조이다.
이 오층석탑은 통일신라시대 석탑의 일반형을 따르고 있으나, 하층기단이 협소하고 옥개석 추녀 끝이 살짝 들려 있는 등
고려시대 탑의 특징을 보여준다.
글쓴이가 금산사를 찾았을때 미륵전 벽화처리공사를 하고 있었다.
석련대는 석조연화대좌의 준말로, 불상을 올려놓는 돌로 만든 받침대이다.
높이 1.67m에 둘레가 10m가 넘는 연화대로 대석 전체가 하나의 돌로 되어 있다.
연화대좌는 흔히 볼 수 있는 것이지만 이것은 형태가 희귀하고 크기도 매우 거대하며, 하나의 돌로 조각한 것이지만 여러 개의
돌을 사용한 것처럼 상ㆍ중ㆍ하의 구성이 정연하다.
금산사 육각다층석탑
대적광전 오른쪽 앞마당에 위치한 이 탑은 원래 봉천원 구역에 있었던 것을 이 곳으로 옮겨온 것이다.
점판암으로 된 육각다층석탑으로 기단부와 탑신부, 상륜부로 구분되며 각각의 구조는 모두 별개의 돌로 구성되어 있다.
최근 미륵전 옆 보제루 우측에 건립된 원통전은 관세음보살을 모신 전각이다.
건물은 정면 3칸, 측면 2칸의 규모로 팔작지붕을 올렸으며, 내부에는 중앙에 불단을 마련하고 최근에 조성한 42수관음보살상을 봉안하고 있다.
경내를 돌아보고 나오는데 조그만 연못에서 보여주는 반영이 아름다워 담아본다.
내일은 수류성당으로 이어간다.
'여행 및 등산 > 산사를 찿아가는길' 카테고리의 다른 글
전화위복의 창건설화를 가지고 탄생한 영암 도갑사 (0) | 2013.12.11 |
---|---|
극락보전 벽화속 관음보살의 눈동자가없는 전설의 강진 무위사 (0) | 2013.12.09 |
연못의 용을 몰아내고 숯과 돌로 연못을메워 창건한 고창 선운사 (0) | 2013.11.29 |
서해바다에서 가장가깝게 바라보고 만질수있는 절집 망해사 (0) | 2013.11.23 |
단풍보러 갔다가 단풍대신 첫눈을 선물한 문수사 (0) | 2013.11.2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