섯알오름 희생자 추모비
한국전쟁 발발 직후 '예비검속' 에 검거 되어 학살된 사람들 중에 132명을 학살 후 7년이 지난후에 유족들이 유골을 수습해 공동으로 이장한 집단 묘역이 있다. 백할아버지의 한 자손이란 뜻의 ‘백조일손지묘’ 가 바로 그것이다.
‘조상이 다른 백서른 두명의 할아버지 자식들이 한날 한시 한곳에서 죽어 뼈가 엉키어 하나가 되었으니 '한 자손' 이라는 뜻이다.
1993년에 4.3사건 민간인 희생자유족회에서 위령비를 세웠다.
아직도 이 곳 야산에서는 사람의 뼈가 많이 묻혀져있다고 하나 1950년 당시 학살당했던 사람들의 유해도 아직 발굴되지 않는 상황이라고 한다.
우리일행은 송악산을 지나 제주 4.3사건의 유일한 학살자 확인터인 섯알오름으로 발걸음을 옮긴다.
완공되지못한 일본군의 고사포 진지도 보인다.
6.25 동란이 터지고서도 계속 이어진 예비검속으로 양민들이 자다가, 일하다, 지나가다가, 이렇게 붙잡혀 들어가 섯알오름에서 총살 당하여 물구덩에 쳐박혀 돌아가신 곳이다.
세월이 흐르고 시간이 지났지만 무고한 양민이 학살된 현장을 둘러보고 나오는 발걸음이 무겁기만하다.
제주민들을 강제동원해 만든 알뜨르 비행장 격납고은 38개를 지었는데 지금 20개가 남았다고 한다.
송악산 북쪽의 상모리 들녘에는 일제의 군사비행장이었던 알뜨르 비행장의 흔적이 또렷하다. 일본 해군항공대 비행장이었던 알뜨르 비행장은 중일 전쟁을 수행하면서 중국대륙침략을 위한 전진기지 역할을 했다.
1926년 처음 계획된 비행장 건설은 1930년 대 중반까지 10여년 동안 1차로 건설된다. 일본군은 1937년에 비행장 확장계획을 세워 기존 20만평에서 1945년까지 80 만 평으로 비행장을 확장해 사세보의 해군항공대 2,500여 명과 전투기 25대를 배치했다.
가미가제호 조종사들도 이 곳에서 훈련을 받았다고 한다. 현재 이곳 알뜨르 평야에는 과거에 펼쳐졌던 드넓은 활주로가 이제 모두 콩과 감자를 심는 밭으로 탈바꿈했지만 당시 건설된 20개의 격납고와 탄약고터 등이 옛 모습 고스란히 남아있다.
가슴아픈 현장을 보고나오니 가슴이 아프다.
기분전환을 위해서라도 얼른 이곳을 벗어나고 싶다.
내일은 용머리해안으로 가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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