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 및 등산/여행 이야기

10년간의 유배생활을 기회로 이용한 다산 정약용/다산초당

Brighten lee 1 2013. 7. 5. 07:34

 

다산초당의 오솔길모습

 

우리는 산행을 한후에 다산초당을 왔기때문에 거슬러서 내려간다.

 

 

천일각

다산선생께서 흑산도에 유배중인 형(정약전)을 바라보았을 것으로 추정되는 위치에 세워져있다.

형제의 우애를 느낄 수 있는 천일각이다.

 

 

 

 

 

천일각에서 바라보는 완도의 모습

 

 

다산초당 동암

 

 

 

 

연지 석가산

 

 

 

강진만이 한눈으로 굽어 보는 만덕산 기슭에 자리한 다산초당은 다산 정약용 선생이 강진 유배 18년중 10여년 동안을 생활하시면서

목민심서, 경세유표, 흠흠신서등 600여권에 달하는 조선조 후기 실학을 집대성 하였던 곳이다.

다산 정약용 선생은 진주목사를 지낸 정재원의 넷째 아들로 태어나 28세에 문과에 급제하여 예문관검열, 병조참지. 형조참의 등을

지냈으며 1801년 신유사옥으로 경상도 장기로 유배되었다가 황사영 백서사건으로 다시 강진으로 유배되었다.

처음에는 강진읍 동문밖 주막과 고성사의 보은산방, 제자 이학래 집 등에서 8년을 보낸 후 1808년 봄에 다산초당으로 거처를 옮겨

해배되던 1818년 9월까지 10여년 동안을 다산초당에서 생활하면서 제자들을 가르치고 저술을 하였으며, 다산의 위대한 업적이 대부분 이곳에서 이루어졌다.   다산초당은 노후로 인해 붕괴되었던 것을 1957년 복원하였고 그 후 다산선생이 거처하였던 동암과 제자들의

유숙처였던 서암을 복원하였다.(강진군청 홈피참조)

 

다조는   초당앞 마당에 크고 넓적한 바위가 하나있다.

다산이 솔방울을 지펴 차를 끓이던곳이다.

 

 

식수로 사용했던 약천 이물로 밥을 하고 차를 끓였을것으로 생각된다.

 

 

다산초당에서 내려가는길

층층이 쌓여진 돌계단이 운치를 더하여준다.

 

 

방명록에 친구들 왔다감을 표시하고...

 

 

다산 선생님의 영정앞에서 목례후 후니가 왔다감을 말씀드린다.

 

 

 

 

 

 

 

 

 

 

 

 

친구일행들이 서둘러 하산한다.

 

 

 

 

다산초당 앞에 할머니께서 소일도 하시고 용돈도 버실겸해서 콩을 삶아오셨다.

울 친구들이 빙 둘러앉아 거의 바닥을 드러냈다.

돈을 세시는 할머니 입가에는 미소가 그칠줄 모른다.

나의 블친들께 부탁을 하고자 한다. 

이런데 와서 가격 흥정하지말고 부르는대로 다주고 사주길 부탁한다.

 

 

 

강진은 역시 도예의 고장답게 길가의 담옆에 허름한 벽에도 도자기가 진열되어 있다.

과연 도자기와 차의 고장 답다.

10년간의 유배생활을 오히려 기회로삼고 600여권의 훌륭한 책을 저술하시고,후학을 양성하신 다산 선생님의 숨결을 느끼는

여행이었다.  다산 선생님과의 아쉬운 만남을 뒤로하고 마량항으로 늦은점심을 먹으러 서둘러 출발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