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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억 중국인의 가슴을 울리는 광주출신의 위대한 작곡가 정율성 선생

Brighten lee 1 2013. 9. 27. 06:30

 

 

 

 

 

 

                                         정율성  선생의 모습

 

 

 

 

13억 중국인의 가슴마다 아로새겨진 ‘중국인민해방군가’의 작곡가 정율성

1918∼1976. 독립운동가, 음악가. 아명(兒名)은 정부은. 별명은 유대진(劉大振). 광주 출신. 숭일학교와 전주 신흥중학교를 다녔다.
태어나서 어린시절을 보낸 조국인 한국에서는 낯선 이름이지만 중국의 2백만 조선족 동포들에게는 추앙을 받고 있는 작곡가다.
정율성은 조선인이면서도 1937년 이후 중국에서의 항일투쟁과 탁월한 음악적 업적으로 최고의 중국음악인 반열에 오르게 된다.
1990년 베이징 아시아경기대회 개막식 첫 프로그램과 2000년 6.15 공동선언 당시 김대중 대통령과 김정일 위원장의 역사적인 첫 만남에 울려퍼진 곡이 모두 그의 곡이었다는 사실은 중국과 북한에서의 그의 음악적 위상을 잘 대변하고 있다.

항일독립투쟁, 국가건설, 문화혁명 등 파란만장한 중국현대사 속에서 혁명성 짙은 작곡으로, 때로는 침묵의 저항으로 일생을 보낸 그는 1914년 광주시에서  4남1녀 중 막내로 태어났다.
광주 숭일소학교를 마치고 전주 신흥중학교에 입학했으나 부친의 갑작스런 죽음으로 학업을 그만둔 율성은 1933년 봄 셋째형을 따라

중국으로 건너가게 된다.

1934년 의열단의 남경조선혁명군사정치간부학교를 졸업한 그는 그곳에서 항일비밀활동에 종사하는 한편, 매주 일요일 상해로 가

러시아의 저명음악가 크리노와 교수로부터 성악을 배우게 된다.

교수로부터 이탈리아에 가서 계속 공부할 것을 권유 받지만 경제적 곤란을 겪고 있던 율성은 1937년 10월 연안으로 옮겨 노신학교에 입학한다.  그는 이곳 연안에서 모든 중국인들의 사랑을 받는 ‘팔로군행진곡’, ‘연안송’ 등 주옥같은 음악을 남기게 된다.

특히, 힘차게 시작되는 ‘팔로군행진곡’은 큰 사랑을 받으며 군가로 채택됐고 1988년 중국군사위원회로부터 정식 ‘인민해방군군가’로

 비준을 받게 된다.

1966년 작곡, 공연 등 모든 예술 활동이 금지된 문화혁명기간 마저도 정율성의 불타는 창작열을 끝내 꺽지 못했다. 그는 이 기간 “그 자체가 웅장하고 아름다우며 기백이 넘쳐흐르는 교향악으로 중국혁명사의 최고탑” 이라고 불리는 마오쩌둥시사 20편에 곡을 붙이는 작업을 완성하게 된다.

대자연을 한없이 사랑하고 노래한 그는 문화혁명이 막을 내린 1976년 12월7일 베이징 근교의 운하에서 낚시를 하던 중 고혈압으로

쓰러지면서 그의 길지 않은 파란만장한 예술적 삶을 마감하게 된다. (엠파스 인용)

 

 

 

 촬영에 열중하고있는 심프로

 

 

 

 정율성 거리에는 정율성의 대표곡인 연안송을 들어볼 수 있는 음향시스템이 갖추어져 있고 그의 생애와 활동에 대하여도

설명되어있다.  그리고 음향시스템에는  연수요,평화의비둘기,3.1행진곡,중국인민해방군 군가등을 들을 수 있게 되어있다.

 

 

 

 

 

 

 

 

 정율성거리로 지정된 도로의 모습

 

 

 

 정율성거리 끝에있는 생가안내판

 

 

 골목안쪽 제일끝이 정율성 선생의 생가다.

주변은 빈집들이 많았는데 이곳을 정비한다고 하는데 그 시기가 궁금하다.

 

 

 초라한 간판만이 이곳이 정율성선생 생가임을 보여주고 있다.

 

 

 

 광주 남구청에서 2004년 6월 12일 이곳이 정율성 선생의 생가터라고 지정하였다.

 

 

 

 허름한 대문이 세월의 덧없음을 증명하고있다.

인터뷰중에 정율성 선생이 후니왔나!  하고 들어오실것 같다.

 

 

 

 생가터라고 주장하신분과 인터뷰중인 심프로

지금 거주하신분은  정율성과는 관계가 없지만 이집이 일제시대때 부터 지어진집이며 정율성의 공부방도 있다고  증언한다.

 

 

 

 

앞마당의 장미

 

불운한 시대를 살았던 음악가 정율성, 음악적 재능은 세계적인 천재성을 가지고 있었으나 해방후 북한에서의 활등으로 인하여 반공을

국시로 하는 우리나라의 정서에 맞지않아 널리 알려지지 않았으나 지금부터라도 그의 생애와 업적을 발굴하여 널리 알려줄 필요가

있으며  이슈가 되고있는 정율성의 생가터는 불로동의 히딩크호텔앞(하동정씨)과, 양림동(남구청) 두군데서 서로 자기네가 맞다고

주장하고 있는바 광주시,문화체육관광부에서 정확히 생가터를 지정을 해줄필요가 있고  지금도 정율성을 흠모하는 중국인들이 광주를 방문하여 그의 생애와 음악에 대하여 추억을하고 간다고하니 한시바삐 생가터를 정비하여 중국인 관광객을 맞이한다면 광주의 관광

산업, 우리나라의 관광산업에도 기여하는것이 클것으로 생각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