극락보전 벽화속 관음보살의 눈동자가없는 전설의 강진 무위사
강진다원의 차밭을 구경하고 인근의 무위사로 발걸음을 옮긴다.
인위적 조작이 닿지 않은 맨 처음의 진리를 깨달으라는 ‘無爲’의 절이름처럼, 무위사는 월출산 남동쪽 기슭에서 한 점의 허세나 허튼 구석 없이 단정한 모습으로 찾는 이를 맞아준다.
신라시대에 설립되어 도선국사가 중창한 뒤, 태조 왕건의 요청으로 선종 가지산문의 선각국사가 머무르며 널리 교화를 펼친
곳으로 유명하다. 따라서 사철 곳곳에는 선각스님의 유물과 흔적이 소중한 문화유산으로 전하며, 가지산문 소속의 선종사찰로 확고한 위치를 다져온 역사를 간직하고 있다.
무위사 천왕문
사찰을 들어서면서 처음 만나는 건물로 정면 3칸 측면 2칸 규모의 맞배지붕 건물이다.
막돌초석 위에 두리기둥을 세우고 주두를 얹었으며, 공포는 외부로 1출목을 두어 외목도리를 받게 한 2익공식이다.
중앙 칸은 사람이 다닐 수 있도록 통로로 하고, 좌우 각 1칸에 사천왕상을 봉안하였다.
무위사 극락보전
국보 제13호로 지정된 극락보전은 정면 3칸, 측면 3칸의 주심포계 맞배지붕의 단층 겹처마 건물로 되어 있다.
무위사에 남아 있는 건물은 대부분 1555년(명종 10) 4창할 때 건립된 것인데, 1983년 대량 상부를 해체 수리하면서 발견된
묵서명을 통해 이 극락전만큼은 1430년(세종 12) 효령대군 등에 의해 건립된 사실을 확인하였다.
감로수에 목을축이며 여행자의 갈증을 풀어본다.
무위사 배례석
극락보전 앞에 있는 직사각형의 대석으로 길이 130cm, 너비 98cm, 높이 9cm이다.
배례석은 불전이나 탑 앞에 배치하여 그 위에 향로나 제기를 올리도록 한 장치이다.
윗면에는 커다란 단판8엽의 연화문이 새겨져 있고, 그 중앙의 원좌에 8개의 씨방이 표현되어 있다.
주위에는 방형 1단의 괴임을 나타내었다.
조성시기는 고려시대로 추정된다.
극락보전 에는 다음과 같은 독특한 전설이 전하고 있다.
사찰에 극락보전을 짓고 난 뒤 얼마 지나지 않았을 즈음, 한 노인이 찾아와 자신이 법당의 벽화를 그릴 것이니 49일간 절대로
법당 안을 들여다보지 말 것을 당부하였다.
주지스님은 이를 허락하였으나 궁금증을 참을 길 없어 마지막 49일째 되는 날, 문에 작은 구멍을 뚫어 법당 안을 몰래 들여다
보고 말았다. 그런데 법당 안에는 노인은 없고 파랑새 한 마리가 붓을 입에 물고 날아다니며 그림을 그리고 있었다. 주지스님이 놀라서 문을 열고 들어가자, 마지막으로 관음보살의 눈동자를 그리고 있던 파랑새는 입에 붓을 문 채 날아가 버렸고, 따라서
극락보전의 벽화 속 관음보살에는 눈동자가 없다고 한다.
무위사 3층석탑은 전형적인 2층기단의 3층석탑으로 각 부재가 잘 조화된 석탑이다.
각 면에는 안상이 새겨져 있는데, 조식이 정교하여 세련되었다.
탑신부는 탑신과 옥개석이 각 1개씩으로 탑신에는 양면에 우주를 모각하고 2ㆍ3층에서는 높이를 줄여 체감을 보였다.
옥개석은 상면의 낙수면이 평박하고 처마의 곡선도 중앙에서 직선을 이루다가 우동의 합각에 이르러서는 가벼운 반전을 보였다.
이 탑은 3층 옥개석과 1층 옥개석 일부에서 약간의 훼손을 입었으나 그 외의 부재는 완전한 상태로서, 통일신라의 전형적인 양식을 비교적 그대로 고수하고 있다.
미륵전에 봉안되어 있는 이 석불은 자연석에 부조로 새겨 모셨다.
이마 위의 육계와 머리형태가 마치 여성의 올림머리와 같은 형태를 하고 있어 일반적인 불상의 형식에서 많이 벗어난 형태를
보여주고 있다. 그러나 불신 주변에 화염문 광배를 선각한 점이나 목의 삼도와 수인 등에서 여래임을 알 수 있다.
부숭부숭한 눈두덩에 입술이 두껍고 인중이 짧으며 왼쪽 어깨는 움츠린 듯 좁게 표현되어 있다.
원래 이 석불은 강진군 성전면 수양리 수암마을에 방치된 채 있었는데 마을 독지가들에 의해 무위사로 옮겨온 것이다.
무위사 선각대사 탑비
선각대사 형미( 864~917)의 탑비로, 비명은 ‘고려국 고무위갑사선각대사 편광영탑비명병서’이며, 당시 태상인 최언위가 글을
짓고, 유훈률이 썼다. 비문 끝에 ‘개운삼년세차병오오월경인삭이십구일무오입’이라는 기록으로 보아 946년(고려 정종 1)에
세운 것임을 알 수 있다. 이 해는 대사의 입적 후 28년이 되는 해이다.
비문에 따르면 선각대사는 무주출신으로 법휘는 형미이고 속성은 최씨이다.
신라 헌강왕 8년(882)인 18세에 구례 화엄사에서 구족계를 받았으며, 그 후 가지산 보림사 구산선문의 태두인 보조선사에게
찾아가 선법을 배웠다. 27세에 당나라에 들어가 운거도응의 심인을 받고 효공왕 9년 (905)에 귀국하여 강진 무위갑사에 머무르니 이때가 대사의 나이 41세 때의 일이다.
무위사 천불전
정면 3칸, 측면 2칸 규모의 맞배지붕 건물로 석재 기단 위에 자연석 초석을 놓고 원형의 기둥을 세웠다.
내부에는 근래에 조성한 금동아미타삼존상과 많은 사람들의 원불인 천불상이 각각의 번호를 가진 채 봉안되어 있다.
꼭 필요한 부재만 사용하여 검박하고 단정한 모습으로 맞아주는 조선 초기의 대표적 목조건축인 극락보전, 우리나라 불교벽화 가운데 가장 앞선 시기의 작품들로 흙벽에 그려진 수십 점의 벽화들, 여의주를 문 용머리 거북이 비신을 받친 채 온전한 모습을 드려내고 있는 선각대사 탑비 등은 무위사의 빼놓을 수 없는 자랑거리이다.
정면 1칸, 측면 1칸 규모의 사모지붕 건물로 막돌과 흙으로 다져진 기단 위에 자연석 초석을 놓고 원형의 기둥을 세웠다.
내부에는 1996년에 조성한 범종을 봉안하였다
무위사 경내전경
무위사를 관람하고 나와 다음행선지로 발걸음을 옮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