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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임금을 섬길수없어 수절과 의리를 지킨 고려의충신 서은 전신민(瑞隱 全新民)의 독수정원림

Brighten lee 1 2013. 10. 2. 06:00

 

 

독수정원림

 

3차에 걸쳐서 탐험한 무등산 시무지기폭포 산행을 마치고 조금 늦은 오찬을 짝궁과 함께즐긴다.

오찬까지 즐겼지만 집으로의 귀가시간이 여유가 있어 가는길에 가사문화권에있으면서 아직 포스팅하지못한 독수정원림으로 발걸음을 옮긴다.

독수정원림은 고려 공민왕(재위 1351∼1374) 때 병부상서를 지낸 전신민이 고려가 망하자 두 임금을 섬길 수 없다며 은거하면서 지었다는

독수정이라는 정자 주위의 숲을 가리킨다.  전해 내려오는 말에 의하면 전신민은 대나무와 소나무를 심어 수절을 다짐했다고 한다.

또한 건물을 세울때 남향을 하는데, 독수정은 북향을 선택한다.

이는 아침마다 북쪽 송도(지금의 개성)를 향해 탄식을 하며 절을 하기 위함이었다고 한다.


 

 

 전신민(全新民)은 계류(溪流)가 흐르는 남쪽 언덕 위에 정자를 짓고 후원에는 소나무를 심고 전계(前階)에는 대나무를 심어 수절을 다짐했다.

 

 


 

 

 서은 전신민(瑞隱 全新民)은 고려말의 공민왕 대에 북도안무사(조선시대의 암행어사와 유사한관직)) 겸 병마원수(중앙군 지휘자))를 거쳐

병부상서(현재:국방부장관)를 역임하였고, 고려가 멸망하자 두문동 72현과 함께 두 나라를 섬기지 않을 것을 다짐하며 이곳에 은거하면서

정자를 지었다고 전한다.

현재의 독수정 건물은 고종 28년(1891)에 후손에 의해 재건된 것이며, 1915년에는 떼지붕을 기와지붕으로 바꾸고 1972년 중수하여 지금에

이르고 있다.

 

 


 

 

 분합문 활짝열려있는 독수정

 

 

 

 

 독수정(獨守亭)이란 명칭은 이백(李白)의 시에 나오는 ’夷齊是何人 獨守西山餓’에서 따온 것으로 은사(隱士)의 고절(高節)을 나타낸 것이다.

독수정역(獨守亭域)은 진입로에 중국 원산종인 회화나무, 자미나무 등의 노거수가 심어져 있고, 정(亭)의 앞에는 자미나무, 매화나무 등 중국

원산종의 수목이 심어져 있는데 그 크기로 보아 1890년대 중건 당시에 심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마루에서 내려다본 앞뜰에는 자미나무와 매화나무등이 식재되어있다.

 

 

 

 

 

 

 

 

 이곳에는 느티나무, 회화나무, 왕버들, 소나무, 참나무, 서어나무 등의 오래 된 나무들이 심어져 있어, 속세를 떠난 느낌을 준다.

조경적인 측면에서 볼 때 고려시대에 성행했던 산수 원림으로서의 기법을 이 지방에 도입하는데 선구적인 역할을 했었던 것으로 여겨진다.

정면 3칸 측면 3칸의 팔작지붕으로 정면 1칸과 후퇴를 온돌방으로 꾸몄다.

창호는 띠살창인데 측면은 2분 합, 정면은 4분 합 들어 열 개로 하여 걸쇠에 걸게 하였다.

예로부터 충신은 두임금을 섬기지 않는것을 당연한것으로 받아들이고 끝까지 의리를 지킨 그마음과 정신을 오늘날의 위정자들이 조금이나마

알아주고 국민을위한 정치를 하면 어떨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