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담양여행) 송강(정 철)문학의 산실 식영정
식영정은 정면 2칸 측면 2칸의 팔작지붕으로 특이한 것은 한쪽 귀퉁이로 방을 몰아붙이고 전면과 측면을 마루로 두고 있다.
명종 15년(1560) 서하당 김성원(棲霞堂 金成遠, 1525-1597)이 창건하여 장인(丈人)인 석천 임억령(石川 林憶齡, 1496-1568)에게 증여한 것이다. 식영정 바로 곁에 본인의 호를 서하당(棲霞堂)이란 또 다른 정자를 지었다고 하며 1995년에 복원하였다.
『서하당유고(棲霞堂遺稿)』행장(行狀)을 보면「庚申公三十六歲 築棲霞堂于昌平之星山 爲終老計……」란 기록이 있는 것으로 보아 서하당과 식영정이 1560년에 지어졌음을 알 수 있다. 제봉 고경명(齊峰 高敬命, 1533-1592), 송강 정철(松江 鄭澈, 1536-1593)등과 함께 ’식영정 사선(息影亭 四仙)’으로 부르기도 한다.
서하당 김성원은 송강의 처외재당숙으로 송강보다 11년이나 연상이었으나 송강이 성산에 와 있을 때 같이 환벽당(環壁堂)에서 공부하던 동문이었다. 송강 정철은 이곳 식영정과 환벽당, 송강정(松江亭) 등 성산 일대의 미려한 자연경관을 벗삼으며『성산별곡』을 창작해냈던 것이다. 또한, 송강은 이곳을 무대로 하여 면앙정 송순(俛仰亭 宋純), 하서 김인후(河西 金仁厚), 고봉 기대승(高峰 奇大承) 등 당대의 명유들을 스승으로 삼았으며 제봉 고경명, 옥봉 백광훈(玉峰 百光勳), 귀봉 송익필(歸峰 宋翼弼) 등과 교우하면서 시문을 익혔다.
식영정 안내도
식영정으로 올라가는 계단을 오르기전 우측에 송강 정철 가사터라는 기념탑이 있는것은 정철이 어린시절 식영정 인근의 환벽당에서
임억령 사위인 김성원과 공부를 하였고,임억령에게 시를 배웠으며 부용당과 서하당을 다니며 학문을 공부하고 훗날 성산별곡등 많은
시가를 지었기에 식영정 일원을 송강문학의 산실로 부르게된 징표라고 생각된다.
아마도 식영정이 생기기 전부터 자리를 지키고 있었을 것으로 생각되는 적송이 글쓴이를 반갑게 맞이한다.
식영정의 모습
식영정(息影亭)은 그림자가 쉬고있는정자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식영정에서 내려다본 성산호 (구명: 광주호)
성산별곡 시비
성산사는 1721년 부터 식영정을 지켜온 소은 정민하와 그의 장남 계당 송정근등 일곱분의 제향을 모셨던 곳으로 수마로 소실 되었던것을 송강의 11대손인 정조원이 1861년 환벽당을 인수하면서 복원 하였다가 흥선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에 의해 폐쇄된것을 2005년에
복원하였다.
부용당은 1972년에 복원하였다.
전면1칸에 측면2칸인 부용대는 1칸이 방이고 1칸은 마루로 구성되었다.
부용당 연못
서하당은 김성원이 36세때(1560년)자신의 호를 따서 지은 건물인 서하당은 장인 임억령을 위해 식영정을 먼저 세우고 자신의 별장인 서하당과 부용당을 근처에 같이지었고 병자호란때 화재로 소실된것을 1995년 담양군에서 복원 하였다.
서하당 김성원은 송 강정철과 쌍벽을 이룰 정도로 학문과 문학의 깊었으며 거문고를 잘타는 팔방미인 이었다고 한다.서하당은 전면
3칸,측면 2칸에 왼쪽으로 방이하나 있고 방 옆에 또다른 마루가 있어 차를 마시며 시를 읊기에 좋은 환경이었다.
송강 정철은 이곳 식영정과 환벽당, 송강정(松江亭) 등 성산 일대의 미려한 자연경관을 벗삼으며『성산별곡』을 창작해냈던 것이다.
또한, 송강은 이곳을 무대로 하여 면앙정 송순(俛仰亭 宋純), 하서 김인후(河西 金仁厚), 고봉 기대승(高峰 奇大承) 등 당대의 명유들을 스승으로 삼았으며 제봉 고경명, 옥봉 백광훈(玉峰 百光勳), 귀봉 송익필(歸峰 宋翼弼) 등과 교우하면서 시문을 익혔다.
부용당 연못의 연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