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가지를 올바로 하는 이가 거처하는집 / 강진 사의재
사의재옆 노거수
지금도 한낮에는 뜨거운 헻빛이 대지를 뜨겁게 달구고 있지만 아침저녁으로 불어오는 시원한 바람은 가을이 얼마남지 않았음을
말해주고 있다. 그러나 지금 내리쬐는 태양은 들판의 곡식과 과일에게는 유익한 태양이기에 반갑게 맞아본다.
올해 유난히 이글거리는 뙤약빛도 참아냈는데 수확의 기쁨을 맛보기위해 조금을 못 참으랴!
그래도 더운 날씨이지만 남도답사 일번지인 강진으로 출장갈일이 있어 일도보고 포스팅도 하기위해 카메라를 챙겨서 강진에
도착한다.
사의재(四宜齋)는 다산 정약용이 1801년 강진에 유배 와서 처음 묵은 곳이다. 사의재는 이곳 주막집(동문매반가) 주인 할머니의 배려로 골방 하나를 거처로 삼은 다산이 몸과 마음을 새롭게 다잡아 교육과 학문연구에 헌신키로 다짐하면서 붙임 이름으로 “네가지를 올바로하는 이가 거처하는 집”이라는 뜻을 담고 있다.
다산은 생각과 용모와 언어와 행동, 이 네가지를 바로하도록 자신을 경계하였던 것이다.
“생각을 맑게 하되 더욱 맑게, 용모를 단정히 하되 더욱 단정히, 말(언어)을 적게 하되 더욱 적게, 행동을 무겁게 하되 더욱 무겁게”
할 것을 스스로 주문하였다. 사의재는 창조와 희망의 공간이다.
사려깊은 주막 할머니의 “어찌 그냥 헛되이 사시려 하는가? 제자라도 가르쳐야 하지 않겠는가?”라는 얘기에 자신 스스로 편찬한
「아학편」을 주교재로 교육을 베풀고, 「경세유표」와 「애절양」 등을 이곳에서 집필하었다.
다산은 주막 할머니와 그 외동딸의 보살핌을 받으며 1801년 겨울부터 1805년 겨울까지 이곳에 머물렀다. (강진군 홈피참조)
사의재옆 우물
우물 배수로
사의재 측면
정자와 연못의 모습
정약용의 남도 유배길 안내도
유배길 총거리는 65.7km다
사립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가본다.
맑은생각,엄숙한용모,과묵한 말씨,신중한 행동등 네가지를 행하는곳 사의재
화장실
동문주막의 모습
동문주막의 모습
가격도 착하고 맛도 좋을것 같은데 후니는 시간이 맞지 않아서 패스 했다.
다산 선생님의 '애절양' 글귀가 반갑게 맞아준다.
애절양(哀絶陽)은 1803년 다산 선생이 신유사옥과 황사영 백서사건으로 인해 장기에서 강진현으로 귀양가서 지은시이다.
조선후기의 시조로 당시의 슬픈 사회상을 반영하여 지은시 이다.
큼지막한 무쇠솥이 반갑게 보인다.
부엌의 모습
다산 선생이 거처했을 방의 모습
붉게핀 배롱나무는 떠나간 님 다산 선생을 기억하고 있을까?
주모상
동문밖 주막집 주모와 딸은 다산 선생을 처음 맞이해준 강진 사람들이다.
"어찌 그냥 헛되이 사시려 하는가? 제자라도 가르쳐야 하지 않겠는가? 주모의 카랑카랑한 목소리가 들리는듯 하다.
다산 선생님도 훌륭하신분 이지만 한눈에 보통인물이 아님을 알아본 주모도 보통사람은 아니다.
이 두분의 만남이 없었다면 ...
사의재를 둘러보고 나오면서 다산 선생이 강조한 네가지 즉 생각을 맑게하고,용모를 단정히 하고 ,언어에 조심하고 ,행동을무겁게
할것을 스스로 다짐하면서 사의재를 돌아나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