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 및 등산/여행 이야기

우리나라 차(茶)의 아버지 초의선사를 찾아서

Brighten lee 1 2013. 8. 7. 06:30

 

초의선사 탄생지 입구의 대각문

 

 

초의(艸衣)는 조선 정조 10년(1786년) 4월 5일 전남 무안군 삼향면 왕산리에서 태어났으며 속성은 흥성 장(張)씨이며 이름은

의순(意恂)이다. 초의(艸衣)라는 호는 출가 후 스승 완호(玩虎) 윤우(倫佑)로 부터 받은 것이며 일지암(一枝庵)은 재호(齎號)이다.

15세때 나주시 남평에 있는 운흥사로 출가하였으며 19세때 해남 대둔사(大芚寺)에서 완호(玩虎)스님으로부터 구족계(具足戒)를 받았다.탱화를 잘그려서 당대 오도자(吳道者)의 경지에 이르렀으며 한국 최고의 근대화가인 소치(小痴) 허련(許鍊)이 초의의 문하에서 그림을 배웠다. 서예는 천의무봉(天衣無縫) 바로 그것이었다.

강진에 유배중이던 다산(茶山) 정약용(丁若鏞)으로부터 유학과 시문을 배웠으며 완당 김정희(金正喜)등 당대의 석학들과 종파를 초월

하여 교유하였다. 39세때 대흥사 뒷편에 일지암(一枝庵)을 중건하고 이곳에서 초의선(艸衣禪), 동다송(東茶頌), 다신전(茶神專)등을

저술했다.   55세(1840년)에 헌종(憲宗)으로부터 대각등계보제존자초의대종사(大覺登階普濟尊者草衣大宗師)라는 시호를 받았으며

58세(1843년)에 고향을 찾아 집은 다 헐물어가지고 잡초만 무성한 부모의 무덤을 보며 눈물로 시를 지었는데 귀고향(歸故鄕)이라는

시이다.   1866년(고종 3년) 7월 2일 입적하시니 세수(世數) 81세요 법랍(法臘)은 66세였다.(무안군청 홈피참조)

 

 

 

초의선사 안내도를 참고하여 한바퀴 돌아본다.

33도의 여름날씨에 좋아서 하는일인데 무엇이 힘이들까?

 

관리사무소의 모습

 

 

 

 

 

초의선사를 만나러 대각문 문턱을 넘는순간 녹차잎이 글쓴이를 반긴다.

그런데 차잎이 이렇게 클까?

 

 

 

초의선사 동상과 비석들

 

 

 

연꽃과 어우러진 용호백로정

 

 

용호백로정에 매달린 풍경

 

 

재현한 일지암 초당

 

 

초의선사

 

 

초의선사 기념관벽에 설치된 손 조형물이다

도지사를 비롯하여 이름있는 사람들의 손의 모습이다.

 

 

 

다성사를 향하여 올라간다.

 

 

 

 

다성사 올라가는  터널에 청포도가 익어가고 있다.

 

 

금오초당

 

 

 

조선차 역사 박물관

 

 

 

조선차 역사박물관 뒤로 등산로가 있다.

초의선사도 만나고 등산도 하고...

 

 

 

 

 

초의선원

 

초의선사의 생가터 대문

 

 

초의선사 생가

 

 

58세(1843년)에 고향을 찾아 집은 다 헐물어가지고 잡초만 무성한 부모의 무덤을 보며 눈물로 시를 지었는데

귀고향 이라는 시이다.  

 

 

 

 

 

생가터 문은 닫아져 있어서 출입은 뒤쪽으로 해야한다.

 

 

우리나라의 차문화에서 초의선사를 빼놓고 차문화에 대하여 이야기할 수 없다.

그만큼 우리나라의 차 문화를 발전 시켰기 때문이다.

옛날 지조있는 선비나 양반들이 밥은 굶어도 하루세끼 차는 꼭 마셔야 한다고 했으니 차가 얼마나 중요한지는 새삼 강조하지

않아도 될것이다.   그리고 초의선사를 만났고 포스팅까지 했으니 초의선사 하면 떠오르는곳이 있으니 해남 대흥사의 일지암을

반드시 포스팅을 해야 초의선사 포스팅을 마쳤다 할것이니 가까운 시일내에 해남 대흥사로 갈 계획을 해본다.

그런데 날씨가 더워도 너무나 덥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