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주광역시 서구 8경중 하나인 만귀정
광주광역시 서구 세하동에 있는 조선시대의 누각인 만귀정으로 향한다.
장마는 끝났는지 모르지만 서울과 경기도 등지에서는 물난리가 나고 수재민이 발생하지만 남도의 땅에는 이글거리는 뙤약빛만
연일 내리쪼여 낮이고 밤이고 활동하기 어렵게 만든다. 이열치열로 광주광역시 서구 세하동에 있는 만귀정으로 향한다.
서구 8경의 하나이기도한 이곳은 광주광역시 문화재자료 제5호로 1984년 2월에 지정되었다.
흥성장씨 문중의 소유로 건축규모는 정면2칸,측면2칸의 팔각지붕이며 이외에도 습향각과 묵암정사가 있다.
동네 주민들은 이곳은 광주사람들의 유원지 로서는 최고의 장소였으며, 봄이면 벚꽃이 흐드러졌고, 여름이면 창포꽃이 땅바닥을
뒤엎었고, 가을이면 연못가에 붉게 물든 상사화가 군락을 이루었으며, 신성일, 윤정희, 허장강 등 명스타들이 출연했던 영화
‘꽃상여’, ‘탈선 춘향전’도 이곳에서 촬영했다고 한다. (서구청 홈피참조)
동하마을 입구에 석재로된 마을 이정표가 있다.
만귀정 정자옆에는 세월의 무게를 느낄 수 있는 노거수가 받침대에 의지하며 생명을 연장하고 있다.
만귀정은 전북 남원에 살던 효우당(孝友堂) 장창우가 광주 서구 동하에 이사한 후 후학을 가르치기 위해 지었다.
정자의 명칭에 대한 유래로는 효우당(孝友堂)이 그의 늙은 인생을 자연과 더불어 보내겠다는 영귀(詠歸)의 뜻으로 해석된다.
자연경관이 아름다워 당시 시인 묵객들이 찾아와 시를 짓고 서로의 흥취를 돋은 곳으로 유명하다.
흥성장씨의 선조인 효우당 장창우가 조선조 현종 12년(1671년)에 현 만귀정 자리에 터를 잡고 연못을 팠으며 그 판 흙으로 동산을
만들고 수중에 서당을 세운것이 시초인 듯하다. 후에 이곳에 동족마을을 이루며 살고 있는 흥성장씨의 후손들이 만귀 장창우가 후학을 가르쳤던 옛터에 그 유덕을 기리기 위하여 1934년에 중건하였고 그 후 1945년에 중수하였다.
만귀정에 걸려 있는 장창우 선생의 詩 팔경(八景)
瑞石明月(무등산에는 밝은 달이 떠 있고)
龍江漁火(용강에는 어부들의 불빛이 있네)
馬山淸風(마산에는 맑은 바람 산들거리며)
樂浦農船(낙포에는 농사를 위한 배가 오가네)
漁燈暮雲(어부들의 등불에 저녁 구름 피어나고)
松汀夜雪(송정에는 흰눈이 밤을 밝히며)
錦城落照(금성에는 아름다운 저녁노을)
野外長江(들밖에 길고 긴 강물이 흐르네
들어갈 때는 취하고 나올때는 깨라.
만귀정 옆 좌우로 두개의 긴 석재에 ‘성석’(醒石)과 ‘취석’(醉石)이라는 글자가 새겨져 있다. 들어갈 때는 취하고, 나올 때는
깨어나라는 의미를 찾을 수 있다.
습향각
만귀정 계단을 내려와 연못의 다리를 건너면 습향각이 있는데 이곳은 1940년에 효우당 7세손 묵암 장안섭이 지었는데
사방 1칸의 팔각지붕 으로 주위의 연꽃 향기가 엄습하여 온다는 뜻의 이름이다.
묵암정사
만귀 선생의 후손인 정안섭 송정읍장(현재 광주 광역시 송정동)의 공로와 덕행을 기리기 위해 1960년 광산군민들이 성금을
모아 건립한 것이다.
만귀정 지연은 원래 주변의 논에 물을 대어줄 목적으로 만든 인공 저수지에다 섬과 동산을 만들고 정자를 세운데서 출발했던 것으로
생각된다. 그러한 이유 때문인지, 논 사이에 끼어 있는 못은 전통적인 방지가 아닌 부정형 적인 D자형을 이루고 있다.
그렇기는 하나 중도를 넣어서 3개의 섬으 로 이루어진것은 전통적인 신선사상 양식으로 볼 수 있다.
글쓴이가 방문했을때는 연꽃이 피지 않았으나 지금쯤은 만개했으리라 생각한다.
습향각과 묵암정사를 둘러본뒤 다시 만귀정앞으로 돌아왔다.
처음터 잡은후 현재까지 약 300년이 지난시간이 흐른 만귀정 정자앞의 노거수 에게서 세월의 덧없음을 느껴본다.
서구 8경중의 하나인 만귀정을 여행하고 나니 더워도 너무덥다.
이마와 등줄기에 흐르는 땀방울은 어디에서 닦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