팔만대장경의 품에안긴 해인사
신라 제 40 대왕인 애장왕의 왕후가 몹쓸병에 걸려 백방으로 좋다는 약을 써봐도 뚜렷한 효험이 없었다.
왕은 여러 신하들을 여러곳으로 보내어 덕이 높은 스님을 모셔올것을 명하였다.
고승을 찾아헤매던 신하들은 우두산을 지나다가 하늘로 뻣어오르는 신령한 오색광명을 보게 되었다.
그리고 선정에 잠겨 있는 두스님을 만나게 된다.
신하들은 예를 올린 뒤 찾아오게 된 내력을 이야기 한다. 그러자 두 스님은 오색실을 내 주면서 실의 한끝은 궁전 뜰의
배나무에 묶고 다른 한쪽은 문고리 묶어 두라고 하였다.
두 신하는 스님들 말대로 궁전에 돌아와 그대로 했더니 배나무가 죽어가면서 왕후의 오랜병이 말끔히 나았다.
이에 왕과 왕후는 기뻐하며 은혜에 감사하기 위하여 우두산에 대가람을 창건할 수 있도록 하였다.
그 절이 바로 가야산 해인사이다
우리나라 삼보사찰 (해인사,통도사,송광사)가운데 한곳인 해인사는 고려시대 부처님의 힘으로 국가를 지키려고
제작했던 팔만대장경이 보관된곳으로 여느 사찰과는 비교가 안된 큰 규모를 자랑하는 사찰이다.
소리길끝의 종착역 해인사로 들어가본다.
반드시 납부해야하는 문화재 입장료
부도전의 전경
해인사 입구의 포토죤
이 고사목은 서기 802년에 순응과이정 두 스님의 기도로 애장왕후의 난치병이 완치되자 왕이 은덕에 감사하여 해인사를
창건할 수 있도록 하였는데 이를 기념하여 식수한 나무라한다.
1200년의 세월을 해인사와 더불어 성장하다가 1945년에 고사하고 둥치만 남은모습이다.
입구에서 바라보니 편액이 4개나 걸려있다.
국사단
정면 6칸, 측면 2칸의 우진각지붕 건물로 동측에서 제3칸째에 솟을대문을 마련하여 출입문의 역활을 하고 있다.
해인사의 제3문으로서 초창연대는 알수없고 1490년 인수대비와 인혜대비가 중수할때 이 문도 새로 세우고 불이문이라 하였다.
화재로 인하여 19세기에 재건한 것으로 추정된다.
보경당
구광루는 큰스님들만이 법당에 출입할 수 있었다.
그래서 이 누각은 법당에 들어갈 수 없는 일반 대중들이 모여 예불하고 설법을 듣는 곳이다.
감로수에 목도 축이고 소리길따라 걸어온 다리쉼을 해본다.
울 나라는 인터넷 강국이다.
스마트폰을 꺼내 촬영중인 모습
해인사의 금당인 대적광전(大寂光殿)은 창건주 순응ㆍ이정 스님이 802년에 지은 건물터에다 1818년에 다시 지은 것이다.
팔작지붕에 앞면 5칸, 옆면 3칸의 규모를 하고 있다.
고려시대에 새긴 목판(木板)으로 총 54종 2835판 가운데 28종 2725판은 국보, 26종 11판은 보물로 지정되어 있으며, 현재 일명
동서(東西) 사간판전(寺刊板殿)에 봉안되어 있다.
이 목판들은 <금강경>,<화엄경>등의 대승경전과 신라,고려,중국의 고승이나 개인의 시문집 및 저술들이다.
안쪽에 보관된 대장경의 모습
대장경이 보관된곳은 일반인 출입금지다.
팔만대장경 경판을 샘플로 제작하여 보여주고 있다.
대장경이 보관된 곳을 빠져나와 가야산 감로수에 목을 축인다.
독성각 전경
대적광전 아래 서 있는 석탑으로, 넓은 뜰 한가운데에 자리 잡고 있어 일명 ‘정중탑(庭中塔)’이라고도 불린다.
탑은 3층 기단 위에 3층의 탑신(塔身)을 올리고 머리장식을 갖춘 모습이다.
본래 기단은 2층이었으나 1926년 수리할 때 기단을 넓히고 한 층을 더 얹음으로써 통일신라 탑의 전형인 2층 기단의 모습을 깨뜨렸다.
위층 기단의 모서리와 가운데, 탑신부의 각 층 몸돌 모서리에는 기둥 모양을 새겨 놓았다.
영지
가야산의 정상이 연못에 비쳐서 붙여진 이름이라한다.
성철 스님의 사리탑